그래서 우리는
백야

 S#1



살다보니까 진짜 별일이 다 있어.
그치. 그렇게 말하며 동의를 구하듯 흥민은 액정에 뺨을 더 붙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꽉 쥔 가방끈이 무색하게 대책이라곤 없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티켓판매기 화면은 이미 매진을 알리는 문구를 내건 지 오래였고 창구에선 원래 샀던 가격의 2배를 지불해야 티켓을 주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8시에 출발하는 아침기차를 놓친 게 이렇게까지 화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냐고. 가방에서 먹다 남은 젤리를 찾는 손이 분주해졌다. 아니, 아니라니까. 늦잠 안 잤다구. 진짜 눈앞에서 놓친거야. 가지런히 신은 운동화 발끝이 구부러졌다 제자리를 찾는 동안 수화기 너머로 한숨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가 이제 어떻게 할 거고.



“내 최근에 새로 배운 단어가 있거든. 스불재라고.”
“그게 뭔데.”
“스스로 불러온 재앙. 지금 딱 니 상황이제. 맞나 안 맞나.”



솔직히 잘못을 따지자면 처음부터 일을 꼬긴 했다.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엄마 친구가 스페인에서 사는데 이참에 가서 좀 지내면서 공부하다 오는 게 어떻겠느냐고. 휴학 지겨울 때도 됐는데. 가보고 싶어했잖니. 다정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은 게 화근이었다. 마음에 찍은 점 지도에도 찍으면 다 되는 줄 알고. 타지살이가 쉬운 것도 아닌데. 짐 쌀 때 들떴던 어깨와 기대감은 눈앞을 지나는 인파에 치이고 쓸려 휘발된 지 오래였다. 앞으로 1년. 떠나올 때 등 두드리던 손들을 실망시키기엔 너무 이른 시점이었다.



“갈 방법은 있고?”
“응. 데리러 온댔어.”
“누가.”
“그분 아들이. 아 그 왜, 있잖아. 나랑 다섯 살 차이 난다던.”
“진짜가. 금마는 거서 여가 어데라고 온다하노. 지도로 찍어도 족히 2시간은 달려야 되는 거린데.”
“그 정도로 멀어?”



불운은 겹쳐온다고 마침 비까지 내렸다. 스페인 날씨 좋다던 건 다 거짓말이지. 초조한 마음에 입술만 물어뜯던 흥민이 놀란 소리를 냈다. 곧바로 지도 어플부터 켜보니 그말대로 2시간 15분이 찍혀나왔다. 망했네. 망했어. 여기 몇 년간 살았던 친구의 말이니 틀릴 이유가 없었다. 통유리로 된 외관 벽을 따라 멍울져 흐르는 빗방울도 원망스럽고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백팩도 원망스러워 질 즈음 축 처진 몸을 벽에 붙이고 완전히 주저앉았다. 기차를 놓쳐서 고생이겠다. 조금 전에 나갔으니 얼마 간만 기다려달라는 내용의 문자를 손에 쥔 이상 기다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렇게 2시간쯤 지났을까.




살면서 어떤 순간은 꽤 오랜 시간을 잊히지 않을 감각으로 남는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이끌리는 시선들. 집중되는 관심이 무색하게 기차역 대기실을 휘둘러 훑더니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귀에 대며 천천히 다가온 올블랙 라이더자켓 차림의 남자. 멈춰선 발등 위로 떨어진 몇 안 되는 빗자국들. 그리고 비 냄새에 섞여 끼치는 강하지 않은 향.



“어, 찾았어. 방금.”
“……”
“지금 앞에 있어요.”



그리고 h에게는 s와 마주한 그 순간이 그랬다.






6년 만의 재회다. 강산 변할 시간을 다 채우진 못했어도 사람 변하기엔 충분한 시간인 줄 알았던 짐작이 무색해졌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하나 고민했던 시간 들이 무색하게도 재차 소개조차 필요 없었다. 어릴 때 봐서 기억이나 할까 싶었던 걱정과는 반대로 이름까지 기억해내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생소했다. 열넷. 저보다 한참은 어렸던 미성년에 처음 만나 자그마치 스물이었다. 키는 두 뼘보다 훨씬 컸고 눈빛이 그대로인 얼굴은 이목구비만 더욱 뚜렷해졌다. 무엇보다 마냥 어리게 느껴졌던 얼굴이 곧장 성년의 길로 들어선 그 느낌이 묘해도 너무 묘해서. 흥민은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드넓은 대지 위로 물드는 노을 대신 운전대를 잡은 옆얼굴에 시선을 따라붙였다.



다정하지만 세울 벽은 세우는 애. 흥민은 하우스메이트로 재회한 승호의 첫인상을 다시금 그렇게 정의했다. 여전했다. 무거운 캐리어를 방까지 들어다 주면서도 제 방에 들어올 때는 꼭 노크를 해달라던 모습도. 그러면서도 고생하셨어요 오시느라 하는 말을 건네며 문을 열어주던 손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방은 여기 쓰시면 되고, 화장실은 복도 끝이요.”
“응. 그럴게. 고마워.”
“저녁 아직 안 먹었죠.”



그러고 보니 배가 좀 고픈 것 같기도. 긴장에 가려졌던 허기는 곧 얼굴을 드러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엷게 웃은 얼굴이 겉옷과 차키를 집어 들었다. 간단한 거라도 포장해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요. 사양하기엔 쉽지 않았던 친절이 미소를 남기고 집을 떠난 뒤 캐리어를 열어 짐을 정리했다. 열아홉. 도망치듯 떠나온 여기서 엄마랑 몇달을 머물렀다. 그때 흘려보낸 것들이 기억 사이로 한번쯤은 발을 들인 적이 있는 집일 것이다. 이제는 빛바랜 기억을 옷 사이로 켜켜이 접어 옷과 함께 옷장에 밀어넣었다.



돌아온 손에는 포장된 팬케이크가 들려있었다. 식사가 1인분인데 대한 의아한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마땅한 대답이 돌아왔다. 엄만 어제부터 일이 좀 생기셔서. 당분간은 집에 못 오실 거에요. 포크와 나이프가 가지런히 놓이고 접시가 꺼내졌다. 그걸로도 모자라 계단을 오르내려온 손이 식탁 위에 수건을 놓는 동안 흥민은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아 케이크 위로 시럽을 들이부었다.



긴 얘긴 나중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오느라 많이 피곤했을 거니까 이만 쉬어요. 저도 그만 올라가볼게요. 고개를 조용히 끄덕이자 눈앞에 선 얼굴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 그리고 이건 제 번호.


능숙한 손놀림으로 휴대폰에 이름을 새긴 몸이 방으로 돌아갔다. 저런 터치 몇 번으로 아는 사이가 되는 시대다. 저장된 이름이 액정에 뜨자 새삼 기분이 또 묘했다. Paik. 방금 우린 무슨 사이가 된 걸까. 다시 아는 사이 정도에서 시작인가. 한입 가득 베어 문 따뜻한 팬케이크가 입안에서 뭉개졌다. 먼 길이었으니까, 피곤하니까, 불편할까봐 한 배려라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사라진 기척을 붙들고 서운함을 토로하는 데에는 딱한 이유가 없었다. 포크 끝을 무는 입술이 아쉬운 듯 벌어진다. 밥 먹을때까지는 옆에 있다 가지.






첫인상은 꽤나 오래도록 지속됐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벽이란 걸 알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수기 어려웠다. 어릴 적 모습만을 기억하는 기억과 겹쳐지기엔 저보다 더 어른스럽게 커버린 괴리에서 오는 어색함인지도 모르겠다고, 흥민은 막연히 짐작했다. 승호는 필요 이상을 묻지 않았고 흥민 또한 그 이상을 답하지 않았다. 반가운 인사가 오가야 하는 의무가 존재하는 관계도 아니었다. 과하지 않은 친절은 선을 넘는 법이 없었으나 때로는 한계의 존재를 지울만큼 끝이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소소하게 안부를 묻는 대화가 전부였지만 스물다섯은 그 속에 내재한 다정함을 캐치해내기엔 충분한 나이였다.


시간은 기억을 미화하지만 지나가도 제자리인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 아침 챙겨 먹어요 > 같은 포스트잇이 붙은 간단한 아침식사를 식탁 위에서 마주할 때 같은 한결같은 다정함이.


그럼에도 시선이 붙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어서. 흥민은 저녁식사후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에다 시선을 길게 걸어두곤 했다. 그때도 또래답지 않게 성숙한 애였다. 그렇게 하나 둘 눈에 걸기 시작하니 마음에도 걸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혼자 떠올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누군가를 마음에 들인다는 게 그런 일이었다. 모르는 세월 속에서 저만큼이나 커버린 어깨와, 부재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자랐을 기억을 천천히 읽어내려 애쓰는 동안에도 시간은 지나갔다.





처음 며칠은 어색함으로, 그 뒤는 밀려오는 일상에 이리저리 떠밀려 허우적대며 정신없이 버둥거렸던 나날이다. 문득 제대로 얼굴 본지 일주일이 넘어가는 걸 깨닫던 시점이었다.



“조심.”
“어, 승호다.”



헤실거리는 얼굴 위로 떠오른 실없는 웃음이 막 귀가한 품에 고개를 박았다. 품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박하냄새. 여름과 어울리는 냄새다. 더불어 향을 뒤집어쓴 사람과도.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다가온 흥민을 자연스레 받아낸 승호의 시선이 바닥을 뒹구는 캔으로 옮겨갔다. 이리저리 방황하다 자리를 잡은 얼굴 탓에 어깨 언저리가 뜨거웠다. 솔직함이 발을 내딛기 적정한 온도였다. 왜 이제 와.




“많이 마셨어요?”
“아니, 그냥 맥주 한 캔 했어.”



기껏 세워온 벽이 무너지기에도 충분한 거리라 승호는 등에 얹은 손을 머뭇거렸다. 신기해. 그때는 너 여기보다 한참 낮아서 이만했는데. 형 손 작은 건 여전하네요. 니가 커버린 거야. 이유도 속도 모르는 움직임이 실없는 말을 뱉고 웃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렇게나 유하고, 무해하고, 여린 사람이었다.



“여기서 좋은 냄새 난다.”
“형이 좋아했잖아요 이 향.”
“그런 걸 다 기억해?”



누가 한 말인데 기억을 못 할까. 어리다고 감정의 온도까지 낮았던 건 아니었는데. 이거봐. 시내 나갔다가 샀다? 선물로 줄게. 이제 가면 아마 오래 못 볼 것 같아서. 내가 좋아하는 향인데 너랑도 닮았어. 나중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생기면 뿌리고 다녀. 알았지?



“그러게요. 정작 준 사람은 기억도 못하는데.”
“……?”
“또 속도 없이 좋고. 맞죠.”



조금 씁쓸한 웃음이 입가를 스쳤다. 의아한 표정이 저를 향함과 동시에 승호는 흥민을 안아들었다. 흐릿한 시야로 생각 많은 옆얼굴을 본 게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세상이 흐릿하게 점멸했다.


 


 

학교에 동양인이 새로 왔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타인의 삶을 안주거리로 씹고 뜯고 맛보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그보다 맛난 안주는 없으리란 게 흥민의 추측이었다. 좁은 동네였고 작은 학교다. 소문은 진원지는 없으나 진폭이 빠른 지진처럼 교내를 흔들었다. 전학 온 주 말미에는 새로 온 전학생이 그 ‘Paik’와 같이 산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퍼져나갔다.



“오늘은 같이 안 와서 잘 모르겠는데.”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는 걸 빨리 눈치챈 것도 그 때문이었다. 흥민은 의도가 빤한 질문을 모른척하며 가방끈을 쥐었다. 끼고 돈다느니, 어제는 차에서 같이 내리는 걸 봤다느니. 굳이 보태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름과 엮인다는 건 그런 거였다. 별다른 액션과 리액션 없이도 늘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고 큰소리를 내지 않아도 존재감 넘치는 이들의 삶. 부재의 부피감을 증명하듯 소문은 질 나쁜 꼬리를 물었다. 그 기분 나쁜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흥민도 마찬가지였다.



“무시해요. 말해봤자 자기들 입만 더러워지지.”
“…알아.”
“표정은 하나도 아닌데? 가서 한마디 하고 와줘요?”
“아냐, 뭐하러.”
“승호 걔가 문제네. 연락도 안 받고. 이런 건 당사자가 해명해야지 새끼가 또. 형 혼자 두고.”



그럼에도 인복은 있었는지 친구도 생겼다. 가볍긴 해도 꽤 괜찮은. 재윤은 승호의 오랜 친구라고 저를 소개했다. 새 식구 딸렸다더니, 소개도 안 시켜줘서 직접 보러왔어요. 저보다 형이신 줄은 몰랐는데. 적당한 온도의 넉살이 기분 나쁘진 않아서 그냥 뒀더니 여기까지 왔다. 형이 이해 좀 해줘요. 재윤이 흥민의 어깨에 자연스레 손을 두르며 덧붙였다.



“잠수 심하게 탈 때 자주 그래요. 물밑으로 들어간 물고기새끼마냥 밖이랑은 아무것도 안 닿으려 들거든요.”



그 말 그대로 그 날 이후 얼굴 한번을 내비친 적 없는 승호였다. 평소의 흥민이었으면 서운하다고 생각할 법도 했다. 아니 아마 높은 확률로 그랬을 거다. 어딜 간 거지. 보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무의식의 발목을 잡는 것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전히 어렵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파티에서의 그 일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계속을.







처음이 특별할 거란 기대는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게 사람 사이의 관계든 새로운 취미의 시작이든 다를 바 없었다. 한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기대의 크기가 클수록 깨어짐과 동시에 가해지는 물리적 충격이 크다는 것. 늘 알고 있지만 간과하는 사실이다. 새 학기 새 학교의 개강 첫날이라면 그런 보편적인 기대 정도는 가질 수 있다던 흥민의 생각은 반절도 못 알아먹은 채 진도를 빼기 시작한 수업과 함께 바닥을 내보였다. 에너지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까 일탈이 필요한 거죠. 가끔은 이렇게 평균 이하들처럼 정신 놓고 놀아줘야 재충전이 된다니까? 아니이, 그래도. 나는 싫다고. 화려한 조명. 시끄러운 분위기. 술.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집약된 파티 같은 거랑은 태생적으로 거리가 먼 삶만 살아온 흥민은 가벼운 펀치 몇 잔에 달아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짚으며 옥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랬기에 느즈막히 도착한 승호를 마주한 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고 난 뒤였다. 승호는 입구부터 손에 쥐어진 맥주 한 병을 들고 내부로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지나는 어깨들마다 친근함을 표시하며 들이받았지만 정작 반기고픈 이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저택은 밤을 기점으로 완전히 젊은이들의 성전이 된 듯했다. 학교에서도 줄곧 주류의 삶을 살아왔던 인기인의 파티답게 주최자가 하루 동안 별채로 쓰던 건물을 내어주는 선심을 부린 탓에 건물은 초입부터 각종 술과 대마냄새로 손님들을 반기고 있었다. 뒤늦게야 멀리서 흥민을 발견했지만 그마저도 흥밋거리를 제대로 문 무리들에 둘러싸인 뒤였다. 뒷모습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떼어낸 것도 결국 그 같잖은 한마디였다.



학교에 제대로 얼굴도 안 비추던 스타가 월플라워는 챙겨야겠고, 그래서 친히 파티까지 온 투샷이 어지간히도 흥미로웠다는 게 감상이라면 감상이었는지. 소문은 당사자의 등장에 요란하게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요즘 끼고 돈다던 애가 쟤냐, 사귀냐, 잤냐.



질 나쁜 농담에도 수위랑 정도란 게 있는 법이었다. 거기까지만 해라. 승호는 옆에서 붙어드는 사람들을 떼어내고 자세를 고쳐앉았다. 슬슬 긁히기 시작한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분위기를 명목으로 참아주는 데에도 한계란 게 있었다.



“걔랑 잤냐?”
“…….”
“아직 안 잤으면 이걸로 한잔 먹이고 시작하지그래. 좋아서 아주 죽어날텐데.”



아마 그쯤 멈췄어야 한다는 건 직감보다 앞선 감각이었다. 온더락잔에 든 액체를 흔들어 보이며 킬킬대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그러나 분위기 파악에 아둔한 부류가 늘 그렇듯이 도를 넘는 발언이 스트레이트로 하한선 위를 질주했고, 이쪽을 보는 시선이 당사자의 것이었단 걸 알아챘을 때 테이블 위 반쯤 남았던 마티니 병은 그대로 머리 위로 사정없이 들이부어졌다. 입을 틀어막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소름끼치도록 침착한 눈동자가 이미 한계점을 넘어버린 분노를 조용히 드러냈다. 입가에 걸린 엷은 미소는 태생적 격차에서 기반한 빈정이었다. 손목에 누군가의 월급 일년치를 두르고 사는 삶과 그러지 못한 삶. 시계를 풀어 던지는 행위도 비슷한 메시지였다. 억울하면 가져가서 팔아. 세탁비정돈 나오겠지.


이 씨발새끼가. 멱살이 쥐어지고도 흔들림 없는 표정에서 이미 상황은 승자를 알렸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라고.”


별다른 무리 없이 손을 쳐낸 입가에 가느다란 조소가 걸렸다. 상대할 가치도 없는 부류를 대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썩은 것들에까지 예의를 차릴 필요는 없어서.








승호는 찾아 헤매던 얼굴을 테라스에서 재회했다. 안도한 얼굴을 보니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연결고리가 죄다 끊어진 기분이다. 목끝까지 차오른 소리 없는 감정들에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흥민도 마찬가지였는지 둘 사이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압축된 글자의 첫음 끝에서 터져 나온 진심도 다르지 않았다.



“고마워.”
“아뇨, 사과해야 될 일이잖아요.”
“…….”
“미안해요. 안 들어도 될 말인데 듣게 해서.”



어리게 굴기 싫어서 6년을 기다렸는데 결국은 이런 식의 재회였다. 승호는 저도 모르게 입술 끝을 짓물렀다. 햇수로만 6년. 그 정도의 세월이 지나도 모르겠다. 몰랐고 모를 거였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 일에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방법을.



“밖에 나와 있었어요?”
"응. 안에 더워서."
"얼굴 안 빨갛던데."
"계속 보고 있었어?"



다른 데 시선 갈 틈이 어디 있어요. 밤은 늦었고 진심이 멋대로 튈 시간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을 뱉을 것 같아 승호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열대야를 식히는 바람이 불어와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불어 넘겼다. 명암진 얼굴 위로 길잃은 거리의 빛들이 지나고 있었다. 이제야 숨이 좀 트이는 기분이다. 사이로 가로막혔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기분.



다르게 말하면 시간이 핑계가 될 수 있는 타이밍. 흥민은 노출을 길게 늘려놓은 채 찍힌 섬광들처럼 두서없는 감정을 애써 재정렬 했다. 어쩌면 기다린 순간이다. 기다린 게 맞았다. 지금처럼 솔직하게, 제대로 얼굴을 볼 기회가 지금까지 많지는 않았으니까. 오늘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제대로 시작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니까. 오늘이어야 했다.




“처음엔 니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럴 이유가 어딨다고.”
“아는데. 솔직히 좀 그렇잖아. 갑자기 딸린 식구 생긴 셈이고. 그렇다고 우리가 오래 본 사이도 아닌데.”
“……”
“나는, 그게, 나는…그러니까. 내가.”
“……”
“혼자 너무 빠른 것 같아서.”



밤기운을 빌어 첫입을 떼자 달려나오는 건 뒤이은 진심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또 혼자 속도위반일것같아.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물었다.



“나는 여기서 믿고 기댈 데가 너 하나라도 너는 아닌 건데. 내가 너무…”



관계는 에너지소모를 수반한다. 맺고 끊고 지속하는 동안 끊임없이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짐은 되지 않았으면 하는 선에서 울고 웃는다는 게 다 그런 거다. 그리고 세상에는 죽어도 그런 평형에서 기울어져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관계도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마무리를 짓지 못한 뒷말에 담긴 복잡한 생각을 읽은 듯 손에 쥐고 있던 병을 빼내 창가에 올려두곤 다가온 저 다정한 눈에게만큼은 절대로.




승호는 순간 흥민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렇게 투명하지. 너무 투명해서 바닥이 다 보일 지경이었다. 이렇게나 여린 사람 눈 밑에 꼭 눈물점까지 박아넣고 세상에 내보내야 했을까. 들은 말을 곱씹으며 뒷말을 고르는 속이 시끄러웠다. 좀 그런 사람 때문에 이런 적은 없었다. 이렇게까지 … 모든 게 엉망이어도 괜찮은 기분이 들 리가 없잖아.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게까지 재고 조심스럽게 구는 타입도 아니었건만 유독 이 눈앞에서만큼은. 처음부터도 그랬고 지금도.




“정리 하나도 안 됐으니까 그냥 듣기만 해요.”
“……”
“그땐 어려서 제대로 들릴까 확신이 없어서 못 했던 말이 있는데.“
“……”
“그냥요.”
“……”
“그냥 편하게 와요. 서라면 서고, 눈감아달라면 감고, 져달라면 져줄게요. 빠르든 느리든 다 맞춰주고. 밀면 밀리고 당기면 어느 쪽으로든 밀려와 줄 테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있어줄 테니까.”
“……”
“그런 계산 안 해도 세상 충분히 복잡하니까 와요 그냥.”
 


한번쯤은 그래도 되니까. 무슨 짓을 해도 다 받아줄 수 있는 사람. 언제든 편하게 기대면 기꺼이 무너져줄 사람. 그거 내가 하게 해줘요.


두서없는, 그러나 진심이었다. 흥민은 바람에 밀려온 박하향을 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부터 가도 돼?”
“말해요, 뭐든.”



망설임 없는 대답에 잠깐 아래로 떨어졌던 시선이 웃음기 섞인 낯으로 다시금 옷깃 끝을 쥐었다.


”나가자. 둘이서 마시고싶어.“


시간은 자정. 하루의 끝이자 다시금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S#2




민은 여름이 본격적인 시작을 알릴 즈음 집으로 돌아왔다. 38도를 웃도는 더위는 이 나라에 처음 발을 들였던 해를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버섯을 자르다 말고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스피커폰 상태로 신호음이 가던 휴대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좀 전에 장 봐서 들어왔어. 오랜만에 보는데 살이 더 내렸길래. 맛있는 거라도 많이 해먹여서 보낼게.”
“마음만 들어도 고맙네. 잘 좀 부탁해. 이상하게 어릴 때 보내는 것보다 마음이 더 쓰이네.”
“자식 물가에 내놓는 마음이 다 똑같지, 뭐. 아직 우리 눈엔 다 애라 그래.”



문득 고개를 든 시야에 발을 물에 담근 둘이 들어왔다. 집을 살 때 수영장을 들이길 잘했구나 싶었다. 붙여만 놔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부산스러운 오후의 한때다. 한쪽이 발을 세게 내리치자 곧장 한바탕 물싸움이 시작됐다. 다 큰 애들 둘이 저러고 노는데. 사랑스럽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흐뭇한 미소와 애틋한 마음이 동시에 밀려왔다.



“고마워.”
“뭐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거 몇 년 만에 봐. 그러고 나서는 처음 데려와서 몇 달간 마음 안 열어줄 때처럼 굴어서 걱정이었거든. 이젠 그때보다 커서 속도 잘 모르겠고.”
“속 깊은 애잖아. 잠깐 봐도 한눈에 알겠더라. 닮았어, 너랑.”
“그걸 누가 몰라. 알아서 그래, 알아서.”



그 흔한 말썽 한번 부린 적 없는 아들이었다. 주방 창문으로 집으로 걸어들어오는 승호를 본 민이 수화기를 귀에서 떼어냈다. 똑똑. 노크소리를 뒤이어 문틈으로 물기를 대충 털어낸 얼굴이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나타났다.



“엄마.”
“응, 아들. 왜?”
“밖에 그릴 예열 다 됐어요. 준비되는대로 천천히 내려오세요.”



또 속으로 저 혼자 삼키지. 그게 안쓰러워서.


 


 
가까워지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많아진다. 그건 곧 일상에서 공유하는 범위가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음식, 음악 취향. 습관 같은 것들. 토요일 오전이면 자주 가는 팬케이크 집에서 포장해온 케이크를 먹었고 늘어져 과제를 했으며 그러다 책을 얼굴에 얹고 낮잠에 들었다. 지루해질 때쯤 물에 들어갔다 나와서 데이빗 보위의 < Heros >를 들었다. s는 단 음식을 입에 대는 횟수가 잦아졌고 h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었다.
그렇게 물드는 계절이었다.




“왔어요?”
“응. 오늘 너무 덥다, 그치.”
“그러면서 팔짱은 끼고 싶고?”
“져준다며.”



이대로 낮잠이나 자고 싶다. 흥민이 손을 감은 팔에 고개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옆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식의 장난이 불편하지 않은 걸 보니 새삼 우리가 편해지긴 했구나. 내리쬐는 태양이 뜨겁다. 뒷목 다 익을 것 같아. 그러면서도 기대기 쉽게 낮아진 팔은 먼저 도망가지 않을 걸 알았다. 더위에 굴복하지 않는 이 좁고 가까운 거리가 좋았다.



“이 방은 진짜 그대로다. 요즘도 글 쓰고 그래?”
“가끔요. 생각나는 거 있으면.”



주인을 닮아 깔끔하게 정리된 책장 군데군데 손때묻은 책들이 여럿이었다. 승호는 몸을 낮춰 그중 하나를 꺼낸 뒤 밖으로 나왔다. 수영장이 보이는 차양막 아래서 과제하는 건 흥민이 제일 좋아하는 일들 중 하나였지만 그날은 너무 더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녹아내리듯 의자와 한 몸이 된 걸 본 승호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자고 일어나요. 이따 깨워줄게. 썬글라스를 낀 채 노트북을 두드리던 손이 눈을 부비는 흥민을 달랬다. 고개를 끄덕였다. 발치로 보이는 물결만큼이나 소소하고 담백한 유속으로 흐르는 일상이다. 깨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늘따라 졸린 눈을 붙들고도 옆얼굴에 오래도록 시선을 걸어두는 이유도 다르지 않았다.



“너 있잖아, 진짜 잘생겼어.”“형은 귀엽고요.”
“지금 또 나 놀려?”
“그럴까 생각 중이긴 해요. 방금 건 진심이었고.”


받아주지 마. 버릇나빠져. 또 마음에 없는 말 하지. 좋아하는 거 다 알아요. 아, 진짜.



”진짜 너 없었으면 여기서 어떻게 버텼을까 싶어.“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오기 있어요?“
”그냥 하는 얘기야.“



물론 진심이고. 옆으로 돌아누워 눌린 볼 사이로 잠꼬대같은 웅얼거림과 그 뒤를 따르는 차분한 대답. 서로를 알아서 할 수 있는 대화가 좋았다. 그냥 이런 게 좋아. 영원했으면 좋겠어. 요즘 드는 생각에는 브레이크가 없었고 그게 마냥 나쁜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잠들기 전까지 한참 더 승호를 바라보던 흥민이 입을 열었다. 승호야.



”나 물 좀 갖다 줘.“



서로를 더 잘 알게 된다는 건 비밀이 없어진다는 이야기기도 했지만, 때론 그 반대기도 했다. 모르는 공백이 생길 때 관계의 간극은 더 멀어진다. 순순히 대답하며 일어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눈이 시큰거렸다. 내리쬐는 태양이 긁고 지나간 자리가 죄다 뜨거웠다.








모르는 소리에요, 형. 재윤은 그렇게 운을 뗐었다.



“요즘 형이랑 붙어 다니고 얼마나 유해졌는데. 유유상종이 괜히 사이언스겠냐고.”
“원래는 어땠는데?”
“원래는, 좀. 형도 알잖아요. 좀 어렵고. 근데 다들 말은 한번쯤 걸어보고 싶고. 뭐라 말하긴 애매한데 딱 까놓고 이유 없이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부류 있잖아요.”
“그렇지.”
“그렇다고 걔 쪽에서 뭘 딱히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럼 너는 어떻게 친해졌는데?”
“누나가 의사라서요. 예전에 강에서 여동생 구해준 적도 있고. 이래저래 서로한테 진 빚이 좀 있어서.”



눈앞에 놓인 과일이 벌써 반쯤 사라졌다. 흥민은 오렌지를 집어들며 남은 통을 재윤 쪽으로 밀었다. 어쩌다 나온 얘기인진 모르겠지만 더 해보라는 의미였으나 재윤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쪽으론 눈치가 빠른 탓에 동시에 화제도 막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건 그렇고. 이번주 바비큐파티 올 거죠?”
“생각 좀 해볼래. 친구들끼리 하는 거라며. 내가 거기 끼면 좀 그렇잖아.”
“뭐가 어때서요. 우리야 사람 많으면 좋지. 걔가 형한테 말 안 해요?”
“뭐를?”
“그날 승호 생일이에요.”



그건 못 들었는데. 흥민의 표정이 좀 구겨졌다. 얘기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재윤이 수습에 나섰다. 원래 자기 얘기 잘 하는 성격도 아니고. 바빴으니까.



“뭐 어차피 진짜 생일도 아닌데요. 그냥 데려온 날이 생일 되어버린 거……지.”
“……”



말을 이으려다 흥민의 얼굴을 본 재윤이 자리에 그대로 멎었다. 와, 설마. 잠깐만. 아니, 아니, 형. 아……오늘 의도치 않게 사고를 세게 치네. 폭탄 피하려다 지뢰를 밟아버린 격이었다. 무릎 언저리에서 방황하던 손이 주먹을 쥐었다.  


“아니 뭘 또 그렇게까지 심각해지고 그런대. 그런 거 아니니까 표정 풀어요.”


머리를 넘기곤 흥민의 눈치를 살피던 재윤이 숨을 골랐다.


입양아에요, 걔.


두 대를 연속으로 얻어맞은 머릿속이 얼얼했다. 그러나 동시에 s는 p를 떠올렸다. 조용한 뒷모습과 너른 어깨를. 문득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외로워서 어떻게 견딘 거야. 잠깐 떨어져 나와 있는 나도 이런데 너는…….



h는, s가 보고 싶었다.





밭은 숨이 턱밑까지 찬다. 민은 외출중이었고 오는 길에 보낸 문자는 답장이 없었다. 무작정 걷다 보니 여기였다. 열쇠를 꺼낼 때쯤에야 돌아온 의식 사이로 물소리가 들렸다. 홀린 듯 옮긴 발걸음이 수영장으로 향했다.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는 때보다 더 자유롭게 호흡하는 게 아닐까. 처음 드는 생각은 그랬다. 승호는 물속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워보였다. 얼마간을 그렇게 서 있었을까. 긴 유영 끝낸 몸이 물에서 빠져나와 수건을 두르는 걸 흥민은 먼발치서 지켜만 봤다. 연기를 느리게 태워내며 조용히 생각에 잠긴 뒷모습을.

입양아에요, 걔.

저렇게나 많은 생각을 어깨에 지고도 어떻게 이렇게 조용할 수 있었을까. 남편이랑 사별하시고 데려온 거라고 들었어요. 속이 상했다. 위로를 받았으면 돌려줄 줄도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우리가 기울어지는 쪽은 변한 게 없나봐.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요. 여름이라도 밤엔 추운데.”
“승호야.”
“…무슨 일 있어요?”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를 알아챈 얼굴이 조심스레 묻는다. 예전에, 우리가 어렸고 너는 더 어렸던 그날에, 철이 없어 언성을 높이곤 집을 나간 뒤를 따라 네가 나한테 왔을 때도 꼭 이런 기분이었느냐고, 흥민은 되묻고 싶었다. 아무 말 없이 내어준 작은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됐었는데. 지금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할 말 있어서.



“갑자기 이런 말 좀 그렇지만 혹시나 잊어버릴까봐.”



어른이 되면 이런 건 다 저절로 배워지는 건 줄 알았는데. 쓸데없는것만 배웠나보다. 이럴 때 무슨 말부터 해야 하는 건지 감히 잡히지 않았다. 사실은, 들은 얘기가 있는데 그거 들으니까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져서 왔어. 그런 말을 속으로 삼키곤 입을 여는데 한참이 걸렸다.



“우리 그때 얘기했던 거…나한테도 그래도 돼. 알지?”
“……?”
“다 얘기하고 기대도 된다고.”
“알아요.”



난 또 뭐라고. 심각한 일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그렇게 덧붙이곤 벗어둔 옷을 집어 어깨에 걸쳐주는 승호였다.
하지만, 그렇지만,
진심이었지만 그러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진짜로 그래야 할 상황이 온대도 참겠지. 그럴 때마다 벌어지는 간극은 철저히 혼자의 몫이 될텐데. 어른도 어른이 되고 싶어서 버둥거리는 세상에 너는 어쩌자고 벌써 이렇게나 커버려서.
 

“하고 싶었던 말 다 했어요?”


하려던 말이 더 있으면 하라고, 얼마든지 더 듣겠다고 말하는 듯한 얼굴이 흥민을 향했다.



“아니. 아직 남았는데 일단은.”
“……”
“안아줘.”



그러니까 이리와. 와서. 나를. 살과 체온이 맞닿는 순간은 이렇게나 고요한데 이렇게나 휘몰아쳤다. 속에서 모든 게 무너져 내려도 이 한 뼘의 좁은 온기 안에서는 모두가 고요를 찾았다.








S#3




포장도로를 달리던 차가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 Cafe Paradiso > 1부 영업시간의 마지막 손님이었던 검은색 포드 레인저는 그렇게 가게를 빠져나갔다. 이 팬케이크 심부름에는 좀 까다로운 데가 있었다. 첫째는 타이밍을 잘 맞춰야 웨이팅이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상대적으로 포장상태가 좋지 않은 해안도로를 다시 30분 달리는 동안 케이크가 망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통화 길게는 못 해. 운전 중이라.”
“알았으니까 하나만 묻자.”
“말해.”
“아침에 문자 넣어둔 거, 그냥 잠 덜 깨서 한 개소리지?”



귀찮은 동승자가 생기기도 한다는 것. 승호는 엷은 한숨을 내쉬며 핸들을 쥐었다. 잔소리할거면 끊고. 이거 식으면 맛없어.



“그래서 진짜 가겠다고? 야, 육로로 달리면 섬 한 바퀴 다 도는데 못해도 여섯 시간은 걸려. 그것뿐이냐. 내려서 경치 보고 밥 먹고 하면 못해도 일곱 여덟 시간은 운전대 잡아야하는데.”
“가고 싶다는데 혼자 보낼 순 없잖아.”
“그래, 그게 이유겠지. 파티도 취소하고 둘이 오붓하게 보내는 거 인정. 생일이라 하고 싶은 것 좀 하겠다는 것도 다 인정이라 이거야. 근데 뭐요? 어디? 어디라고?”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알아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이러는 이유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재윤의 빈정거림이 뭐라고 더 이어지며 귓가를 때리는 동안 머리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가보고 싶었던 데 있어. 마요르카라고.
혼자라도 가볼까 했는데 …….
차 있는 사람 두고 왜요. 가려면 같이 가야지.
편도 안 돼. 출발하면 돌아올 때까지 왕복 풀타임으로 같이 있어 주는 거야. 거기 일출이 예쁘다는데 해안도로 따라 달리다가 잠깐 차 세워놓고 눈도 좀 붙이고. 가는 길에 음악 틀어놓고 새벽공기도 마시고.
네. 그리고 또요?



s는 제 품에 안겨 조잘대던 h를 떠올린다. 하고 싶은 말 남았다더니 밤기운을 빌어 드라이브 이야기를 꺼내는 눈에 박힌 별을 보며 생각했다. 백야에 가까운 긴 낮 뒤에 선 어둠이 된 기분이었다. 평생 이 사람을 거절하는 일은 없겠구나. 할 수 없었으므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누나가 알면 얼씨구나 좋다 그래 잘했다 해주겠냐? 알면 뒷목부터 잡았어, 새끼야. 난리난다고. 아, 난 못해. 안 해.”
“그래서 검진날짜 미룰 수 있는지 물어본 거잖아. 크게 미루는 거 아니고 이틀 정도면 돼.”
“Paik.”
“……”
“잊어버린 것 같아서 말해두는데 8월 곧이야. 까놓고 말해서, 도로 위에서 잠이라도 들면 깰 수나 있을 것 같냐? 그게 돼? 그게 니 의지로 되면 그게 병이겠냐고.”



승호야. 백승호. 타이르는듯한 재윤의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던 그 순간, 고양이가 차도로 뛰어들었다. 차는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정차했다. 충격으로 떨어진 휴대폰이 바닥을 굴렀다. 겨우 다시 호흡을 고르는 시야가 흐릿하게 아찔해졌다. 작은 짐승이 간신히 달아난 자리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속이 메슥거렸다.








나가 있어. 재윤은 수년간의 동거생활을 통해 누나가 그렇게 말할 땐 ‘정말’ 자리를 비켜야 하는 순간인 걸 알고 있었다. 말 안 해도 직감이 하는 일이다. 업고 뛰느라 땀범벅이 된 몸을 벽에서 일으켜 방을 빠져나오는 동안에도 둘 사이엔 긴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빠르게 의식을 회복했지만 그게 별문제가 되지 않을 거란 건 일반인한테나 해당되는 얘기였다. 조금 전에 정신을 차려 침대에 앉은 클라인레빈증후군 환자가 아니라.



매년 주기적으로 2-3주에 걸쳐 찾아오는 이 수면장애엔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꼬박 2-3주, 그리고 길면 한 달을 잠만 자는 것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나 외부의 정신적 충격이 원인이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학계의 추측에 불과했다. 그런 단순한 이유들로 파생되기엔 지나치게 복잡하고 악랄하다는 게 지윤의 평이었다. 하필 동반되는 증상이 간헐적 폭식이나 공격성향의 증가일 건 뭐란 말인가. 이렇게나 착하고, 여리지만 강한 애한테. 왜 하필이면. 그 새벽 혼비백산한 얼굴로 병원문을 두드리던 민의 얼굴을 아직도 기억한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젖어 얼굴을 감싸쥐곤 무너지는 부모의 얼굴을 잊을 수 있는 의사가 몇이나 될까. 민에게 어렵사리 이야기를 털어놓던 날에도 그랬다.


사는 동안 너무……있는 힘껏 눌러 참고 자라서 그래요. 속에 너무 많은 걸 안고 자라서.
눈물이 많은 사람에게 눈물점이 생기듯이, 상처가 많은 사람에겐 마음에 병이 생기는 거라고.



이제 그 아이는 자라서 이만큼이나 컸지만 지윤의 눈에는 여전히 어렸다. 마음 너무 주지마. 못 떼는 정 둘이나 붙여서 고생하는 사람 옆에 두고도 꼭 그래야겠어? 하는 애정어린 잔소리를 듣고도 늘 우는 막내 머리 위에 손부터 올리던 애였다. 피 한방울 안 섞인 삼남매가 지지고 볶고 여기까지 오는데도 저 한결같은 다정이 한몫은 더 했을텐데. 생각할수록 애틋했고 곱씹을수록 속이 쓰렸다. 참았던 물음은 결국 답을 아는 질문으로 입밖에 나왔다.



“꼭 가야겠어?”
“……”
“승호야.”
“……예전에.”



생소한 데는 침묵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자기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 입을 떼는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지윤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강에서 제이 구해왔던 날 밤에요. 애들 다 재워놓고 누나가 그랬었잖아. 이제 쟤네없이 사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어서 두고두고 평생 고마울거라고.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면서 고마워하겠다고.”
“……”
“처음봤을 때도 그랬다며.”
“……”
“얘네 아니면 안 되겠구나. 그렇게 삶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사람들이 있다고 그랬었잖아. 어떻게 해볼 새도 없이.”



서로의 얼굴이 더 잘 보였던 밤이다. 애써 울음을 눌러참는 얼굴을 눈감아주며 앞에 놓인 컵에 조용히 맥주를 따랐던. 그런 것처럼 나도 살다가 마주치는 여러인연들 중에.


“그런 사람 하나 만난 거라고 생각해주면 안될까.”


처음 보는 얼굴이 좀 슬프게 웃는다. 잠이 미친 듯이 쏟아지는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뒤로는 기억 하나 없는 기묘한 마법에 걸린 뒤로는 또 마음에 얼마나 벽을 쌓고 살았을지, 참았을지. 그리고 또 그 벽을 이렇게까지 넘어와 한 사람의 세계를 흔들어 놓은 존재는 누군지.



“오래 안 걸릴게.”
“알아. 처음부터 말릴 생각까진 없었어. 얘기가 들어보고 싶은 것뿐이었지.”


설득은 진작에 당했다. 이제라도 찾아서 다행이다. 너도 기댈 데 하나쯤은 있어야지. 그럼 좀 천천히 자라도 됐을 텐데.



“수면 패턴만 체크 잘 해. 하루에 잠 시간 맞춰서 충분히 자고. 운전대 너무 오래 잡지 말고. 조금이라도 느낌 이상하거나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오케이? 별일 없을 거 아는데 8월 가까워오니까 좀 걱정이 되긴 하네.”
“그럴게. 고마워.”
“조심히 다녀와.”



지윤은 떠나는 뒷모습에 대고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짧지만 긴 여행이 될거란 직감은 오랜 경험적 본능에 가까웠다.










새벽 해안가로 천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바다는 하늘의 거울이라는, 어디선가 들었던 말 그대로 수평선과 부딪혀 조각난 빛들이 파도 위로 겹겹이 색을 쌓아 올렸다. 아직은 어스름이 짙은 시각. 담요에 온몸을 파묻은 흥민이 몸을 뒤척였다. 잠 안 자겠다며 고개만 빼꼼 내밀고 버티던 얼굴이 곤하게 잠든 걸 보니 피곤했던 모양이다. 출발 전에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재윤이한테 얘기 들었어. 인기척 한번에 계단을 뛰어내려온 얼굴이 엉망이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희미한 의식의 연결고리 속에서 클락션에 손등을 내리치면서 생긴 상처를 발견하곤 제가 더 아픈 표정을 했다.


짓씹어둔 입술이 마음에 걸려 엄지를 갖다대자 고개가 달려 올라온다. 입술 그만 깨물어요. 피나겠다. 다정한 위로가 그날따라 더 쓰게 들렸다. 괜찮다는 말로도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 있어서.



아팠겠다.
울지만 마요.
…….
안 그래도 최악인데 지금 형까지 울면. 그때는 진짜.
안 울어. 안 울게.



장난섞인 대꾸에 다급한 대답이 따라붙었다. 이미 한바탕 우느라 부어버린 눈가가 눈에 선해서 승호는 조용히 웃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안아도 돼? 5분만.
5분 좀 짧은데.  
10분만 이러고 있어요.



자각도 전에 뒷목이 부드럽게 잡혀 너른 품으로 들어갔다. 품에서 나는 안온한 냄새를 맡으며 흥민은 그제야 안도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과 귓가로 쏟아지는 목소리가 모두 제 것이라는 사실에.






멀리서 동이 튼다. 긴 어둠과 이별할 준비를 마친 빛이 수평선을 따라 등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조용히, 그러나 빠른 속도로.


부족한 이들의 낙원에 온 걸 환영해요.


차창 틈으로 그 빛을 받은 흥민도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였다. 불시착한 자들도 환영받는 불완전 파라다이스. 누구도 완벽하지 않으니 서로의 불완전함을 온전히 사랑하기엔 더없이 완벽한 곳. 시야엔 이제 막 생동하기 시작한 하루가, 옆좌석에는 그 하루를 온전히 함께할 이가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같은 빛을 얼굴에 담아낸 두 얼굴이 환하게 웃었다.








S#4  




아무도 없는 해변에 자리를 잡은 둘은 간단히 먹고 오래도록 뜨는 해를 마저 봤다. 많이 걸었고 많이 웃었다. 그걸로도 모자랄 땐 가만히 서로의 온기로 대화를 대신하기도 했다.
침묵이 더이상 어색하지 않을 때 관계는 지점을 넘는다. 거기까지 왔을 땐 이미. 우리 사이에 선이 어딨어요. 넘어온 지가 언젠데. 당연하다는 듯한 승호의 대꾸를 들으며 흥민은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그런 김에 내기하자. 달리기 내기.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는 거.”
“그거 너무 뻔하단 생각 안 들어요?”
“그래서 안 할거야?”
“당연히 해야죠.”



해변을 한참 더 걷다 들어온 제안이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금세 더 신난 얼굴이 출발선을 그으러 뛰어갔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뛰는 동안은 상대방 몸에 터치하기 없기다?”
“좋아요. 콜.”



둘은 출발선에 섰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진지하나 싶지만 저렇게까지 신난 얼굴을 보니 또 어쩔수가 없어서. 하나, 둘, 셋. 제대로 폼을 잡은 몸들이 신호에 맞춰 직선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절반을 넘어갈 시점에, 솟아오른 모래바닥에 걸려 흥민이 넘어지려던 찰나, 그보다 먼저 다가온 손이 기울어지는 몸을 받아내 품에 안았다.



“상대방 몸 터치하면 탈락이라니까.”
“....”
“내가 이긴 거야.”



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을 거라고 승호는 짐작했다. 이 무해한 웃음 앞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것이 힘을 잃었다. 무한하고 일방적인 애정. 머릿속은 속수무책으로 선명하리만큼 한 단어를 떠올린다. 항거불능, 뭐, 그런 것들을.



“그래서 소원이 뭔데요.”
“뭐든 들어줘?”
“들어보고요.”
“계약 위반이야 그거. 뭐든 들어줘야지.”



음. 일단은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고. 그렇게 받아낸 하드를 입에 물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승호도 따라서 몸을 숙였다. 휴가철이 아닌 바다에 밀려오는 건 다만 파도뿐이라.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동안에는 서로가 가장 잘 들렸다. 흥민은 바다에 대고 말을 걸듯 입을 열었다.



“여기 처음 왔을 때. 그러니까 짐 싸들고 엄마랑 공항에 딱 내렸는데.”
“……”
“간판이고 사람들이고 하나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냥 그날은 세상 전부가 어려웠던 날인 거지. 원래도 좀 그렇지만.”
“……”
“그러고 나서 너랑 아줌마 만나고, 짐 풀고, 침대에 딱 누웠는데 그 생각이 드는 거야.”



흥민은 귀 기울여 듣느라 아래를 향한 옆얼굴을 흘긋 쳐다보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갑자기 그럴 때 있잖아. 하루를 돌이켜보는데 갑자기 서러워지는 그런 거.



“왜 사람들은 자기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
“그래서 이렇게 고생인걸까. 사랑하는 우리 엄마처럼.”



얘기를 끝낸 흥민을 뒤로 하고 짧은 침묵이 돌았다. 어쩌자고 또 이런 무방비한 얼굴인 걸까. 속을 숨기느라 애쓰며 살아온 이에게 이토록 투명한 바다는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어떤 위로를 건네야 할지를 알 수가 없어서. 다만 가볍게 안아주는 것밖에는.


“Así que necesitamos personas que nos lo cuenten todos los días.
Eres hermosa. Todavía te amo para mañana y siempre.”


위로를 알아들은 흥민이 작게 웃었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기 전에 먼저 장난을 거는 쪽이 되어보기로 한다. 안아달란 말은 안 했는데. 표정이 딱 그랬어요.


“나는 이게 다고…. 니 얘기도 해줘, 승호야. 그게 내 소원이야.”


바다는 여전한 적막. 꼼지락대는 움직임을 통해 전해져 오는 건 익숙한 온기였다. 수평선 위의 어느 한 지점에 길게 눈을 고정시켰던 승호도 길어지기 시작한 침묵을 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섯 살 땐가. 그때 지금 집에 처음 왔는데, 주변에 살던 애들이랑 같이 공 하나 차는 데만 세달이 좀 넘게 걸렸어요.”
“……”“그러고 나니까 알겠더라고요. 아, 앞으로 이럴 일이 많겠구나.”
“……”
“계란 한 판 사면 그중에 가끔가다 깨진 것도 있고 썩은 것도 있잖아요. 제가 그냥 그런 계란들 중 하나였어요. 서로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원하지 않는 타이밍에 원하지 않는 아이였던 거죠. ”



흥민은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가는 얼굴에 시선을 길게 따라붙였다. 평온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류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낸 적은 없어도 속으론 꽤 오래 곱씹었을거란 추측이 어렵지 않았다. 무릎을 모아세우곤 그 위에 올려뒀던 두 손이 묵주를 만지작거렸다.



“솔직히 처음엔 좀 원망스러울 때도 있었는데. 이제 이해는 가요.”
“……”
“자기 힘으로 안 될 때가 있는 거니까, 그런 인연도 있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
“형이 저한테 그랬듯이.”



마음으로 밀려오고 나간다는 게 그런 거였다. 살면서 밀려오는 어떤 파도는 제 몫으론 감당이 안 되기도 하니까. 그런 사람을 만나면 휩쓸리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을테니. 의무로 주어진 관계는 마음의 방향과 다르게 흐르는 게 당연했다. 이제는 지나간 자리에 고이는 것들을 본다. 멀리서 빠르게 밀려온 유속이 오래되고 침체된 것들을 훔쳐 달아나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절벽을 따라 구부러진 도로를 달렸다. 낮게 틀어놓은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다 느낌 오는 장소에 내려서 사진을 찍었고, 또 자주 웃었으며 돌아가야 할 시간을 아쉬워했다. 차가 섬의 가장 높은 부근에 다다랐을 때 흥민은 차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내려서 오래전 누군가 만들어 둔 난간에 기대어 둘은 서로를, 그리고 오후로 접어들기 시작한 풍경을 멀리서 바라봤다.


“우리, 또 6년 뒤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
“같이 있겠죠. 지금처럼”


문득 던진 물음에 당연한 듯 돌아오는 대답을 애정했다. 이 무한히 넓고 깊은 애정에서 숨을 쉬는 일은 과분했다. 그러나 동시에 행복했으므로 눈이 마주친 순간엔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쩌다 이번 생엔 이런 사람이 밀려왔을까.






지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에는 짧은 대화가 오갔다. 여기 일몰도 예쁘대. 다음엔 일몰보러 와야겠네요. 하는 대화들이. 흥민은 웃었다. 있잖아. 난 우리가 참 좋아. 승호는 고개를 돌려 흥민을 빤히 봤다. 아무렇지 않게 저런 말을 뱉고 웃어버리는 무해한 웃음에는 그런 구석이 있었다. 지키려면 뭐든 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나, 혹은 나를 둘러싼 주변보다 상대를 더 생각할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다고 했다. 관계의 반환점을 돌아 어느새 여기다. 내려앉는 붉은빛에 물드는 옆얼굴을 가만히 본다. 그리고 드는 생각을 차근히 인정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흥민은 갈까요, 하며 뒤돌아서려는 옷깃을 잡아끌었다. 이게 갑작스럽고 정신 나간 짓이란 걸 모르지 않는데, 아는데, 정말 알고 있는데.



“키스해도 돼?”



이 사람이라면 왠지 다 이해해줄 것 같아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입술이 맞물렸다. 흥민이 떨어지자마자 승호가 다시 당겼다. 안았을 때처럼 뒷목을 부드럽게 감싸쥐곤 입안을 길게 헤집었다. 오래도 돌아 내딛는 첫발이었다.



“네.”
“하고 나서 대답하는 게 어디 있어.”



웃음에는 웃음으로 대답이 돌아왔다. 약간은 허탈한듯한 표정을 한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다정했다. 처음이잖아요.



“형한테 처음으로 키스하는 사람만큼은 형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면 해서요.”
“……”
“사랑해요, 형.”










S#5



Dear H,



그렇게 시작하는 편지를 받아들었을 때 흥민은 직감했다. 어쩌면 우리는 꽤 오래 떨어져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이야기를 전하러 온 재윤의 마음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8월에 접어들기 전 마지막으로 깐 맥주 한캔을 마시며 이야기를 꺼내던 조금은 낯선 얼굴을 기억한다. 어렸을 땐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자주 울었는데 요즘은 갖고 싶어서 자주 초조해. 이제 애도 아닌데.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던 표정도 눈앞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재윤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초조한 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발끝은 이야기가 끝나고 재윤이 밖으로 나간 뒤에도 한참을 제자리에 멍하니 늘어져 있었다. 창밖으로는 비가 쏟아졌다. 답지 않게 긴 장마였다. 편지는 익숙한 목소리로 다시 시작했다. 오늘은 하루종일 이 종이 한 장을 돌려보며 보낼 생각이었다.



여름이요, 늘 없는 기분이었거든요. 저한테는. 그게 늘 8월 즈음 시작해서 눈뜨면 9월 초가 다 되어가곤 했으니까. 근데 올해는 좀 다를 것 같아요. 형을 만났으니까.
오랜만이라는 말로 부재한 시간을 다 채우기엔 한참 모자라겠지만 그래도요. 솔직히는 좀 설렜어요.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기도 했고. 6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잖아요.


그동안 뭐하고 지냈는지, 어떻게 살았고 누굴 만났는지,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선뜻 말이 안 나가더라고요. 이걸 읽고 있다면 얘길 들었겠지만 … 상황이 좀 그렇기도 해서.




오랜 시간을, 적어도 마음속에서는 수백번을 했던 생각이었다. 깨닫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속도를 낸다. 마음이 하는 일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눈에 들기 시작하니까 보고 싶었고, 보고 있으니 닿고 싶고 만지고 싶었다. 흥민도 모르지 않는 마음이었다.


편하게 오라는 말 여전히 진심이에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 알죠? 깨어나면 다시 어디든 가요. 아직 못 본 일몰 보러 거길 다시 가도 좋고. 아니면 하루종일 집에서 뒹구는 일상도 좋고. 하자는 대로 다 할게요.



‌이제와서 좀 웃긴 얘기지만 사실 지금도 전 형이 좀 어렵거든요. 아마 그만큼 소중해서겠죠. 그만큼 사랑하고.

잘 지내요. 곧 다시 볼 거니까, 하고 싶은 말들은 직접 전하게 아껴둘게요. 그때까지의 모든 하루가 평안하고 무사하기를.  




단정한 필체로 적힌 편지는 거기서 그만 마무리를 지었다. 마침표가 찍힌 자리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보고 싶지만 참아야 할 때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종이를 뒷면으로 넘겼을 때, 흥민은 그것이 언젠가 방에다 종이에 적어 방에다 남겨놓고 왔던 한 줄에 대한 긴 답장임을 깨달았다.



Write about us
-I will


기다리는 날들이 다시금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다시 만나는 날 둘은 긴 터널 끝을 달리는 차 안에서 키스했다. 이거 봐. 또 하고 나서 대답하기 있냐구. 여전히 사랑스럽게 이어지는 투정이다. 듣는 내내 입가로 번지는 건 웃음뿐이라. 오늘도 지는 쪽을 택한 s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잘못한 거 알겠으니까…


입술 더 벌려요. 제대로 하게. 고개를 감싸는 두 손에 순응하는 몸짓과 함께 입술이 맞물린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 Heros >의 끊어진 음정들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Though nothing, nothing will keep us together. We can beat them, forever and ever. Oh, we can be heroes just for one day. 귓가를 스치는 건 다시금 밤바람. 그리고, 옆얼굴을 스치는 여전히 길잃은 조명들. h가 s에게 속삭였다.

“내일이 안 왔으면 좋겠어.”
“저도요.”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 정체한 경계 위에 우리만 고여 영원했으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답고 예쁜 이들은, 때론 자주 상기시켜주지 않으면 그런 사실들을 잊고 산다. 어쩌면 인생은 그래서,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가치있는 사람인지, 살아있는 매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지를 매일매일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여정일지도.

사랑해요, 형
응, 나도. 나도 사랑해

그렇기에 결국은 가장 정직하고 원초적인 고백으로의 회귀를. 입을 맞추고, 서로의 온기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이 순간, 우리는 모두 영원해서.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함까지 사랑했음을.

Therefore We, and our love, are Infinite.
T’ll the End of the Scene.


-fin.

2011 Brand New Awards 2011
2010 Communication Arts Annual 52
2010 If They Can Make it Here

A W A R D S

2015 30 Brightest Design Stars Under 30
2014 Print New Visual Artists Review
2013 ADC Young Guns 9

R E S I D E N C I E S

2010 Print Regional Design Annual
2009 FPO Awards 2009
2008 FPO Awards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