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여름, 이곳에 정착한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였다. 그곳에서 멀끔한 흰 셔츠 차림으로 이사꾼들 사이에 끼어 험한 일 한번 안 해 보았을 듯한 손으로 시종일관 웃으면서 이삿짐을 나르는 그는 아마도 집주인이 말했던 그 남자들 중 한 명이었다. 우리 집과 같은 날 같은 층에 이사를 올 것이라는 한국인 남자 두 명. 중 하나.
안에 딸린 공용 휴게실과 부엌을 제외하면 복도가 숨막히게 비좁은 아파트였다. 남자 두 명이 나란히 서면 꽉 들어차는 너비였다. 그와 나는 짐을 옮기며 수도 없이 서로가 지나갈 때마다 멈춰 서야만 했다. 몇 시간 내내 한 뼘도 안 되는 거리 안에 그의 몸이 있었다. 그는 지나가겠다며 양해를 구할 때도 싱글거렸다. 제 집이 썩 마음에 들었거나 원체 저런 인간이거나.
그 남자는 상자 몇 개를 마저 들여놓은 다음 조금 지친 기색으로 복도 벽에 기대어 서서 이사가 한창인 그의 집 안을 보고 있었다. 방금 전보다 옅어진 웃음기를 띤 그의 옆모습은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내 눈길이 따가웠는지 그는 내 쪽으로 고개를 꺾고 인사한다. 수고 많으세요. 광동어로. 내가 저와 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인사말 대신 가벼운 고갯짓으로 목례했다.
9 crimes
1
이거 저희 집 물건이 아니어서.
짐더미 위에 팽개쳐져있던 재킷은 내가 걸치기엔 품이 넉넉지 않았고 그렇다고 내 아내가 입을 만한 건 아니었다. 아까 본 그 남자는 저의 모국어를 하는 내가 의아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재킷을 받아 든 다음 그 위로 코를 박았다.
제 친구 거 같아요. 같이 사는・・・ 감사합니다.
나는 그 순간이야말로 옆집에 사는 그 두 사람이 단순한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매끈하게 머리를 빗어넘겼던 낮과는 다르게 풀어진 앞머리를 늘어뜨리고 현관 앞에 서서 나를 올려다보는 그가 비 맞은 개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날 뚫어져라 쳐다보는 커다란 눈동자와 그 눈동자 밑에 찍혀있는 점이, 나더러 전부 모른 척 해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2
아내가 출장을 간답시고 집을 떠난 뒤 며칠 뒤의 밤이었다. 나는 옆집 그 남자와 집 근처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둘 다 동거인이 타지로 떠나있으니 같이 저녁이라도 먹자는 핑계로 불러낸 건 내 쪽이었다. 그는 또다시 팔자 가엾은 개 꼴을 하고 앉아있다. 홀로 적적하게 한 평 남짓한 공간을 밝히는 램프 아래서 그는 더 처연해 보였다. 하기야 처를 둔 남자 그리고 동거하는 애인을 둔 남자 둘이 마주 앉아 먹는 저녁식사는 충분히 처량하게 느껴질 만했다. 폭이 좁은 테이블 아래로 내 무릎 끝에 그의 무릎이 자꾸 부딪힌다. 가만히 있는 내 다리를 그는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외려 더 나와 부대낀다. 그는 식사가 다 차려진 테이블 앞에서 더 이상 저을 필요도 없어 보이는 커피잔의 바닥을 티스푼으로 계속해서 긁었다. 안 먹어요? 그는 그제서야 포크를 든다. 힘 빠진 얼굴이 생각보다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입을 열기도 어려워 보이는 그 대신 내가 먼저 운을 뗀다.
시계 예쁘네요.
남자는 맥없이 고기를 썰던 손을 멈추고 자신의 왼쪽 손목에 둘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얄팍한 손목 위의 은시계. 이거요. 남자의 얼굴이 일순 풀어진 덕분에 나는 벌써부터 죄를 짓는 기분이 됐다.
같이 사는 친구가 출장 가서 사다 줬어요.
고맙게도 바로 원하는 대답이 나왔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출장 참 잦기도 하지. 우리랑 같이 사는 사람들은. 나는 남자의 단정한 미소 앞에서 찰나 동안 수도 없이 많은 단어들을 골랐다. 그가 다시 썰기 시작한 고깃덩어리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내도 그거랑 똑같은 시계가 있거든요.
내가 스스로 입 밖으로 낸 말이 나를 후벼판다. 들을 준비도 되지 않은 그는 더 아팠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법으로 묶인 우리와 다르게, 그는 헤어지면 그만이니까. 그 동거인이 혹시나 애인 아니면 다행이고. 괴롭더라도 그에게는 말해주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인지 남자는 차분하게 내 눈을 곧바로 응시한다. 당신 친구랑 제 아내가 보통 사이는 아닌 거 같아요. 오해의 여지가 없는 가장 확실하고 잔인한 단어를 꺼내려고 준비할 때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타이는 부인께서 선물해 주셨나 봐요.
그 사람도 갖고 있어요. 그거.
나는 내 목을 죄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3
텅 비어있을 집으로 그와 나는 걸어갔다. 더 입 놀려봤자 괴로울 뿐이라는 생각을 그도 하고 있는지. 그도 나도 말이 없었다. 콧잔등에 물기가 후둑 떨어진다. 비 온다. 비 와요. 그의 단정한 머리가 다시 젖어서 헝클어졌다. 문 앞에서 나를 올려다봤을 때처럼. 우리는 속절없이 소나기를 맞았다. 그도 나도 우산을 먼저 챙겨 주는 쪽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항상 받았던 쪽. 오늘 비 온다며 우산 들고 현관 앞에서 알려주는 사람 없으면 비를 맞게 되는 쪽. 낯선 섬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들은 홀로 살아가지도 못하는 주제에 멀찍이서 서로의 언저리를 에돌게 된다. 그와 나는 뛰어들어간 건물 아래서 비를 피했다. 거센 소나기는 그의 한숨소리도 감췄다. 둘이 어쩌다가 시작된 걸까요.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어쩌다 시작됐냐고. 나는 그의 옆에 몸을 붙였다. 그의 몸은 차가운 비를 맞아도 아직 식지 않은 채였다. 나는 내 아내도 가지고 있는 그 시계를 찬 손목을 낚아채고 말했다.
같이 있죠 오늘.
몇 번 복도에서 마주친 게 전부인, 얼굴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의 애인이 나의 아내에게 했을 말을 상상하면서. 연기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나는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투로 목소리를 내려깔고 그런 소릴 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말 안 해요. 당신 애인이 그랬을 거라고 말한 적 없는데. 아무튼 그럴 사람 아녜요.
시선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먼저 그럴 사람 아니에요. 그 말은 나보다는 저 자신에게 하는 것 같았다. 그가 눈보다도 더 떨고 있는 손등으로 내 허리를 천천히 훑어내리는 것은 아마도 내 아내가 그랬을 거란 거였다. 손길에는 낭만 따위는 없었고 복수심 비슷한 것만이 느껴졌다. 날 선 마음의 끄트머리는 향할 곳을 잃고 결국 내 쪽으로 가 닿아 나를 찌른다. 찔린 나는 평정심을 조금 잃는다. 나는 경어를 내려놓고 말한다. 마음대로 생각해.
이렇게 우리는 우리를 떠나간 사람들을 변호하기 바빴다.
우리는 둘 다 젖은 셔츠 바람으로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독이 오른 걸음으로 앞장서서 걸어 가는 그의 어깻죽지에 빗물을 먹은 셔츠가 철썩 달라붙어 있다. 남 가엾어 할 처지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나는 그게, 젖은 옷이 달라붙어 불거진 날개뼈가 퍽 가련했다. 소란스러워야 할 주말 저녁인데도 아파트의 휴게실이 적적했다. 복도에 다다른 우리는 각자의 집 현관 앞에 나란히 섰다. 그는 심장이 피를 흘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도에 빗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손에 쥔 문고리만 내려다봤다. 문을 열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또 상황극 하자는 건지 짐작이 잘 안 갔다. 누군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가나. 그러나 그 말을 집어삼켰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복도에 둔 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을 한 뼘 정도 열어 둔 채로.
씻어도 돼요?
바로 옆에 제 집의 욕실이 있는 그가 말했다. 그냥 그러라고 했다. 제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도 힘겨웠나.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그에게 빌려 줄 옷을 꺼내서 문 앞에 놓았다. 욕실 너머로 물이 그의 몸을 타고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 집 안을 채운다. 혹시 물 틀어놓고 우는 소리라도 들릴까 봐 라디오를 켜고 차를 우린다. 아직은 내 아내 때문에 우는 그를 확인할 자신이 없었다. 물소리가 멈추고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옷을 걸친 그가 벌개진 눈으로 걸어왔다. 빨아서 돌려 드릴게요. 듣고 웃었다. 콱 메인 목소리로라도 이런 말을 하는 그가 좀 귀여웠다. 딱했고. 그냥 가지세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만이 우리 둘의 대화를 대신했다. 눈치 없이 명랑한 곡조는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그와 나는 침대를 사이에 두고 멀찍이 앉았다. 그가 입은 짧은 바지 아래로 아까 내 다리와 자꾸만 부딪혔던 무릎이 보였다.
고요함을 부수는 것은 복도 바깥에서 들리는 이웃들의 소리였다. 규칙적이지 못한 걸음소리와 집 안까지 파고드는 웃음소리. 취한 사람들에게서 나는 소리. 다같이 집 밖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온 것 같았다. 휴게실에 사람이 없던 이유였다. 놀러갔다 왔나 봐요. 그가 말하자마자 초인종이 울린다.
누구에요?
나오지 말고 조용히 있어.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더 큰 소리로 들려왔다. 나를 찾은 건 집주인이었다. 휴게실에서 같이 저 시끄러운 사람들과 술 한잔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오늘은 좀 피곤해서,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거절했다. 집주인은 아쉬운 기색만 잠시 비추고 돌아갔다.
남자는 저 스스로가 내 골칫거리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인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다. 실례했습니다. 가볼게요. 옷은 잘 빨아서・・・. 또 저 소리다.
밖에 사람들 있어요.
저 지금 이상해요?
그러고 나가면.
그는 화장대 거울 앞으로 몸을 돌렸다. 거울 안에서 아직 물기가 마르지 않은 머리에 내 옷이 조금 헐겁게 걸쳐져 있는 제 모습을 보고는 얼빠진 얼굴을 한다. 그러고 당신 집이 아니라 여기서 나가면. 여자든 남자든 이상해요. 일으킨 몸으로 어색하게 방 안을 휘적이는 그에게 밖의 술자리가 금방 파할 것 같진 않으니 눈 좀 붙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집 침대에 어줍게 몸을 펼친다. 오늘은 잠이 안 올 것 같다며 중얼대더니 내가 씻고 돌아오자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이 남자의 자는 얼굴까지 보게 되다니. 그것도 내 집 침대 위에서. 잠에 든 그는 모든 일을 까먹은 사람 같아서 나는 그 얼굴을 보고 꿈을 꾸지 말라는 것 정도는 마음속으로 빌어줄 수밖에 없었다. 비를 맞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낯선 침대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는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몸을 눕혔다. 한 팔을 뻗어야 겨우 내 손에 그의 등이 닿을 만한 정도의 거리에서 그를 건너다보았다. 잠에 취해갈 즈음 나는 그 외롭고 불쌍한 등을 껴안은 채로 잠들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밤 나를 혼자 이 집에 내버려 두지 않은 것이 고마워서.
아침까지 한나절을 꼬박 앓았다. 그가 혼자서 덮고 있던 이불이 어느새 내 몸을 누르고 있었다. 너무 단정하게 덮여 있는 걸 보아 그가 떠나면서 덮어준 것 같았다. 텅 빈 침대가 또다시 어색했다. 익숙해지려던 참이었는데. 비가 아직도 내리고 있어 방 안이 어둑했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감기약을 사러 집을 나선다. 비좁은 복도에서 마주친 관리인이 말한다. 오늘 좀 늦게 나가시네요.
감기 때문에 좀 오래 잤어요.
식사 하고 나가세요. 다 같이 먹으라고 죽 끓이고 가셨어요. 손 씨가.
4
방이요?
너도 그 집에 있기 싫다며.
짐 갖고 와서 거기서 일도 해. 나는 그에게 호텔의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이천, 사십, 육 호・・・. 그는 새기기라도 하는 듯 되뇐다.
당연히 핑계였다. 어떻게 하면 남의 일에 관심 많은 그 눈들을 피해 그를 만날까 생각해서 나온 단순한 생각이었다. 같이 비를 맞았던 그 날 이후 우리는 별다른 핑계 없이도 같이 있게 되었다. 사지 건장한 두 남자도 결국 타국 땅의 혈혈단신들일 뿐이어서 동포를 찾아간다. 그와 나는 죄스러워질 정도로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사실 그 죄스러움은 곧바로 둔해져 갔다. 그날 밤 라디오에서 나오는 신파적인 사랑 노래를 배경 삼아 다 식은 찻잔을 들고 저마저도 식어버린 채로 앉아있던 그는 지금 그 촌스러운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내 안에 패인 골을 더듬는다. 움푹 팬 그 골에 쏟아져서 고인다. 속도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빠르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흠을 가르친다. 상처 위로 따갑게 닿는 바닷물처럼. 무슨 생각 해요?
묻는 얼굴이 너무 가까웠다. 그리고 이 거리를 의식하는 건 나뿐이다. 지상 20층에 자리한 호텔 방은 그 어떤 시선도 피해갈 수 있을 법했으나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건 정작 나였다. 왜,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 손끝 한 번 스쳐도 닿은 곳이 저릿했다. 살결이 어색한 관계. 그렇다고 무감각해지지도 못하는 관계.
아무 생각도 안 했어.
아닌데. 했는데. 그러나 그는 더 묻지 않고 내 등에 제 얼굴을 기댄다. 닿는 곳이 화끈거린다.
5
그는 얼핏 제 애인에 대한 배신감까지 잊은 것 같아 뵀다. 그만큼 싹싹한 남자였으나 그 방 안에서 그는 얼마 안 가 내 앞에서 두 번째로 눈물을 보였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뭘. 그는 젓가락질을 멈추고 말한다. 따지는 거 연습하게요. 그 사람 돌아오면.
제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제 말에 답하면 돼요.
해 봐.
그는 서서히 웃음기를 거둔다.
내 말에 솔직히 대답해요.
당신 애인 있죠.
미쳤어?
나는 나름대로 몰입해 줬다. 내 대사가 끝나도 그는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이다.
없어.
날 봐. 없다고? 그가 애원하듯이 말한다. 내 눈 보고 말해.
있어.
그는 반사적으로 내 어깨를 살짝 밀친다.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왜요.
멋 없어. 다시 해.
다시 똑같은 대사를 반복한다. 있어. 애인. 이번엔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축축한 눈으로 나를 볼 뿐이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의 얼굴이 구겨질 새도 없이 볼 위로 눈물이 쏟아진다. 숨 쉬는 것도 힘에 부칠 때까지 그는 중얼거린다. 다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나도 눈물이 많았다면 이렇게 울었을까. 애정이란 게 이다지도 얄궂다. 나는 그를 끌어안았다. 잘 했어. 울지는 말고 그렇게 헤어져. 저는 말 못해요.
안 우는 건 더 못 하겠어. 내 어깨 위에서 그가 도리질한다. 지금 앞에 없어도 이렇게, 울잖아요.
원래 사랑하는 것들이 울게 만드니까. 그러니까 다시 만날 땐 울지 말아야지.
그는 한참을 내 품 안에 있었다. 하지만 울게 하는 것들과는 헤어져. 형은 어떻게 할 거예요? 난 아직 울지는 않았어.
6
우리의 동거인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채여서, 여전히 비슷한 날이 흘러갔다. 퇴근 후에 그를 만나러 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달라진 것은 우리의 관계를 떠보듯 추궁하는 사람들도 생겼고, 그래서 우리는 시간차를 두고 귀가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익숙하게 택시에서 먼저 내린다. 내일 봐. 그가 타고 있는 차가 멀어져간다. 같은 곳을 향해 그는 몇십 배를 더 빠르게 달려간다. 그는 어쩌다가 하필 나를 만나서. 나는 어쩌다가 지금 그를 만나서.
7
영국으로 가게 됐어.
대답이 없었다.
그쪽에서 일손이 부족하대. 당분간 거기서 지낼 것 같아.
여전히 대답이 없어 내가 더 말할 수밖에 없었다.
너도 알겠지만 사람들이 우리들에 대해 얘기해.
우리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이제는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한다. 우리가 그 사람들이랑 같아요? 나는 입술만 깨문다.
날 사랑했어요?
아니.
진심을 헤아려 볼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옆에 서 있던 그는 내 앞을 가로막고 선다.
모르겠어. 나는 결국 덧붙인다.
그게 형 대답이에요? 나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가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만 들었다.
이러다간 후회해. 우리.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헤어지는 연습 시켜 주세요. 입꼬리만 힘겹게 올려서 웃는 그는 처음 봤을 때의 그 얼굴과 닮아 있었다. 내가 괴로움에 말없이 신음하는 소리를 그도 들었을까.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꺼내야 하는 첫 마디.
이제 다신 전화하지 마. 못 만나.
돌아오셨어요?
응.
알겠어요. 그가 내 손등을 감싸쥔다.
전화 안 할게요.
또 아프지 말고, 생각 너무 많이 하면서 지내지 말고, 힘드니까, 그리고 힘든 일 있으면 또 혼자 참지 말고・・・ 두고두고 할 예정이었을 말들이 유언처럼 그에게서 쏟아진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가 내 앞에서 이렇게 속삭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가 쏟아내는 말들이 내 영혼을 갉아먹다가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같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끝났는지 손을 놓는다. 더 이상 그와 닿을 일은 없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가 품 안으로 안긴다. 그는 또 울었다. 세 번째였다. 그를 본 중에서 제일 서럽게 울었다. 못 하겠어요 저는. 이것도 못 하겠어요. 나는 그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싣는다. 연습이라며. 저는 연습도 못 해요. 그는 더 서럽게 울었다. 나는 헤어질 때가 되고서야 사실은 그가 눈물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나 없는 곳에서 또 얼마나 울었을까. 나는 왜 그가 울 때마다 에는 듯이 괴로운데도 울 수가 없을까.
8
그는 벌써 그 호텔에 남아있던 제 몫의 짐을 뺀 상태였다. 나는 탁자 밑에 잘 정리되어 있는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여기에 앉아 일간신문에 실린 소설을 읽던 그가 생각났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몇 개 안 되는 내 짐을 챙겨서 나가기만 하면 된다. 턱을 쓰다듬자 손가락에 끼워진 차가운 금속이 살에 닿는다. 나는 거기에 한참을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두고 간 것은 없는지 거울 앞의 협탁으로 다가가자 무언가가 발 밑에 채였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슬리퍼 한 켤레였다. 옆에 선 내 발보다 훨씬 작은. 그 남자의 것이었다. 내 손 한 뼘도 채 안 될 것 같다면서 웃으면 그래도 저는 잘만 걸어 다닌다고 대꾸하던 그가 생각난다. 끝날 것 같은 괴로움이 도무지 끝나질 않는다. 만약 다음에 만나면 돌려주겠다 생각하면서 그 작은 신 한 켤레를 들어올렸다. 만약에, 다음에, 따위의 단어들이나 나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9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침에 걸려온 전화였다. 수화기 건너편의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와 상대편은 침묵만 수 초간 나눴다.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퇴근 후에 들어간 집은 어딘가 모르게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불이 꺼져있어야 할 집이 어슴푸레하게 밝았다. 내가 스탠드를 켜 두고 나갔었나. 방 안을 둘러보던 나는 내 침대를 보고 멈춰 섰다. 침대 위에 반듯하게 접힌 셔츠와 바지가 한 벌씩 얹혀져 있었다. 최근에 입은 기억이 전혀 없는 내 옷가지가 왜 여기에 있는지 나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 날 비를 뒤집어썼던 그 남자한테 빌려줬었지. 나는 깨끗하게 잘 마른 그 셔츠가 놓인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드디어 내가 그와 떨어지는 순간부터 딱딱하게 얼려 두었던, 만약에 내가, 만약에 그가, 로 시작했던 모든 문장들이 뜨겁게 녹아내렸다. 내가 그에게 말했던 대로, 사랑하는 것들이란 결국엔 나를 울리기 때문에. 여기까지 가져와 버린, 다시 만나면 돌려주려던 그의 슬리퍼는 내 방에서 사라져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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